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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링의 대부 플루어 본문
한국 건설업체들의 영원한 벤치마킹 대상인 플루어 (Fluor)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엔지니어링회사로 평가 받는다. 벡텔과 함께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굴지의 건설회사인 플루어는 수많은 신기록을 내면서 승승장구해왔다.
플루어의 역사는 스위스에서 이민 온 플루어 형제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조그만 건설회사를 1912년에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걸프전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E&C회사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설립자인 존 사이몬 플루어는 전직이 목공 기술자답게 1920년에 매우 효율적인 냉각탑을 자체 개발하면서, 때마침 불어 닥친 캘리포니아 석유산업의 활성화와 함께 석유, 가솔린 및 가스 플랜트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하여 엔지니어링과 건설조직을 갖추게 되었으며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 당시로서는 가장 큰 규모인 10만 불짜리의 쉘 (Shell) 정유공장을 건설하면서 쉘이라는 중요한 고객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정유분야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1933년 플루어 최초의 해외사업인 바레인 정유공장의 냉각탑을 건설하면서 산유국 중동과의 인연을 시작하였다.
이어 불어 닥친 대공황은 사업을 축소시켰지만, 플루어는 장치산업기기의 기술개발에 주력하였으며, 동시에 유능한 기술자들을 해고하지 않고 집을 담보로 봉급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플루어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고옥탄 가솔린과 합성고무의 생산기술을 개발하였으며, 리치필드 정유공장의 알킬화시설을 설계하고 건설하였다. 특히 1940년에서 43년까지는 미국 고옥탄 가솔린 시장의 1/3을 점유하였다.
1946년 전쟁이 끝난 후 플루어는 본격적인 해외진출을 시작하였다. 캐나다, 베네주엘라 및 사우디에서 정유공장과 가스플랜트를 수주하였으며, 특히 몬타나 신규 정유공장을 계약하면서 석유 엔지니어링 분야의 절대 강자가 되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석유화학산업이 부흥하면서 플루어의 활약은 더욱 눈부셨다. 플루어는 그 명성만으로도 수많은 프로젝트를 수주하였으며, 미국정부가 발주한 원자력시설을 건설하였다. 사업 다변화와 해외진출에 힘쓴 결과 사우디 다란 공군기지와 푸에르토리코 정유공장을 건설하였다.
특히, 업계 최초로 축소 플랜트모델을 개발하여 대형 기기설치 전문가가 되면서, 캐나다, 스코틀랜드, 호주, 남아공 등지에서 석유화학플랜트를 설계하고 건설하였다. 1957년에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여 외형을 키웠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플루어가 승승장구하는 시기로 사업은 전 세계로 확장되었으며, 새로운 사업 분야로 해상굴착과 광산사업이 추가되었다.
1962년 쿠웨이트산 원유로 설계된 한국 최초의 울산정유공장 (일산 2만8천 배럴)을 1천6백만 불에 계약하였다. 한국에서 처음 건설되는 대형공사로 문제가 많았으나, 플루어의 성의있는 노력으로 예정보다 2개월 앞당겨 준공하였다. 이어 1965년에는 쿠웨이트국영정유회사가 최초로 발주한 슈에이바 정유공장을 건설하였다.
1967년 해상분야로 진출하기 위해 5개 회사를 인수 합병하였으며, 바로 이듬해에 처음으로 해상시추공사에 참여하였다. 1968년에는 사상 최초로 고압처리장치인 중질유 분해공장을 텍사스에 건설하였으며, 1969년에는 광산과 금속산업에 진출하여 상당한 이익을 냈다.
1972년 알래스카 횡단 파이프라인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20억 불 규모의 해상 펌프장 및 원유터미널을 건설하였으며, 1975년에는 당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인 50억 불짜리 사우디 아람코 가스플랜트를 수주하였다.
플루어의 성공은 태스크포스 프로젝트 매니지먼트라는 선진 기법을 개발하고 적용하면서 이루어 냈으며, 엔지니어링과 프로젝트 관리를 위한 전 업무의 컴퓨터화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성공은 매출을 급속도로 증가시켰다. 매출이 1973년에10억 불을 돌파한 데 이어, 74년에는 44억 불, 75년에는 90억 불로 껑충 뛴 것이다.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플루어는 1977년 남부 캘리포니아의 대형 건설회사인 매출 10억 불의 다니엘을 인수 합병하면서 인원은 20,000명으로 증대되었다. 거대 E&C인 "플루어 다니엘"이 탄생하였으며 미국 내 건설시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980년으로 접어들면서 승승장구하던 플루어는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위기의 시발점은 1981년 22억 불에 인수한 광물회사가 원자재가 폭락으로 말미암아 7.2억 불의 적자를 낸 것이다. 1986년까지 연속 적자를 기록하면서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CEO가 플루어 가문에서 전문경영인으로 바뀌면서 금속회사와 해상굴착시설, 건물과 자산을 매각하는 등 조직을 슬림 다운하였다. 이 강력한 구조조정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적자는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초반은 플루어가 대형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위기에서 벗어나는 시기였다. 에너지성 발주의 플루토늄공장 해체사업 2건을 총 90억 불에 수주한 데 이어, 쿠웨이트에서 10억 불의 석유화학 프로젝트, 인도네시아에서16억 불의 구리광산사업, 플로리다에서 48억 불짜리 고속철도시스템 등의 대형 프로젝트를 연거푸 수주하면서 1996년에는 80개 국가의 사업장에서 110억 불의 매출을 기록하였다.
1997년 미국의 모든 대형 건설업체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미국 내 정유와 석유화학분야의 투자는 최저를 기록하였고, 아시아 경제위기로 신규 수주가 사라짐에 따라 정리해고와 인수 합병에 의한 재편성이 일어났다.
플루어도 마찬가지로 다양화 정책을 포기하고 핵심사업과 시장 중심의 조직으로 재정비하였으며, 1999년 3월에는 대폭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하였다. 1.6억 불의 관리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15개의 지사와 사무실을 폐쇄하였으며, 5,000명의 인원을 감축하였다.
2000년 유가상승으로 중동과 중국에서의 발주가 늘었으나, 플루어는 수익성 있는 프로젝트를 선별 수주하는 전략을 택하였다. EPC 럼섬 턴키의 비중을 줄이고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쪽에 치중함에 따라 1999년도의 매출 113억 불이 2003년도에는 88억 불까지 내려갔으며 인원도 53,000명에서 29,000명으로 크게 줄었다.
2004년과 2005년은 이라크 종전에 이은 고유가로 중동에서 프로젝트 발주가 쏟아져 나오는 호황국면의 시작이었다. 플루어는 이라크 복구공사와 함께 사우디, 쿠웨이트, 아부다비, 카타르 등에서 대형 프로젝트의 PMC로 자리잡으면서 기회를 잡았다.
2006년 말에 사우디 카얀의 석유화학 콤플렉스를 EPCM방식으로 22억 불에 수주하면서 도약의 날개를 폈다. 그리고 2007년은 그야말로 호황 그 자체였다. 사우디 아세틸 콤플렉스를 10억 불, 미국 마라톤사의 루지애나 소재 정유공장을 18억 불,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의 폴리실리콘 공장을 10억 불, 미국 오크 발전소를 17억 불, 호주 철광석확장사업을 9억 불, 미육군 병참업무지원사업을 50억 불, 수도순환 고속도로공사를 14억 불에 수주하면서 기염을 토하였다.
2008년에는 BP의 미국 정유공장을 38억 불, 토탈의 텍사스 정유공장을 19억 불, 마라톤사의 디트로이트 정유공장 확장사업을 15.5억 불, 스페인의 렙솔 정유공장을 13억 불, 텍사스 정유공장의 중질유분해시설을 12억 불, 영국의 해상 풍력발전소공사를 18억 불, 미국 에너지성발주의 원자력시설운영사업을 80억 불에 각각 수주하면서 플루어 역사상 가장 많은 매출을 이루어냈다.
플루어의 2008년 매출은 전년 대비 38%나 높은 사상 최대의 223억 불을 기록하였으며 영업이익은 12.9억 불로 이익율은 5.8%이나 되었다. 수주 잔량은 332억 불로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견딜 수 있는 탄탄한 재무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플루어는 에너지/화학, 인프라, 정부사업, 발전, 글로벌 서비스 등 5개 부문으로 나누어 각 부문별 독립채산제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세계 6개 대륙에 걸쳐 25개 지사를 운용하고 있으며 임직원수가 42,000명에 달한다.
2008년 ENR지는 플루어를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로젝트를 수주한 업체로 뽑았으며 그 액수는 251억 불에 달한다. 2008년 포춘지는 500대 기업리스트 중 플루어를 E&C 분야의 1위 업체로 뽑았다. 또한 기업 윤리 싱크 탱크인 에티스피어 연구소는 2008년 세계에서 가장 윤리적인 기업 중 E&C회사로는 유일하게 플루어를 선정하였다. 플루어가 이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1. 자체 기술은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혁신적인 공법을 가미한 엔지니어링과 탁월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능력으로 명성을 축적해왔다.
2. 발주자의 전략적 제휴를 중시하여 쉘, 듀퐁, 다우, 코노코필립스, 이스트만, 알칸, 듀크, P&G 등 30개 이상의 고객과 상호 협력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로부터의 수주가 전체 20%에 달하고 있다.
3. 경기침체와 새로운 경영환경에 적극 대응하는 구조조정과 전략수정을 끊임없이 진행해왔다.
4. 철저한 리스크 관리와 효율적인 업무 그리고 비용절감을 통해 주주에게 가치를 돌려주는 이윤 성장정책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다.
5.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건설부문과 광산사업을 없애고, 대신에 수익성이 좋은 미국정부에 대한 서비스를 확대하여 조직의 기능을 강화하고 체질을 개선하였다.
6. 전 세계 모든 건설분야의 우수인력을 대상으로 인력 풀을 만들어 인적자원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자체 관리하고 있다. 특히, 폴란드, 인도, 필리핀의 3개 지역에 글로벌 엔지니어링센터를 운영하여 설계와 건설감리 인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설립 후 70년 동안은 플루어 가족이 직접 경영에 참여하여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1984년 적자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플루어 회장이 사망하였다. 이 때부터 전문 경영인이 CEO로 추대되었으며 회사를 슬림화하여 위기에서 구하고 발전시켰다. 플루어는 다른 업체들과는 달리 최상층에 배치된 엘리트 리더들이 회사 전체를 이끌어 가고 있다. 과연 그들의 경영 전략은 무엇일까?
1. 리스크 관리를 체계화하여 조직을 갖추고. 경영전략으로 삼았다. 국제 입찰에서는 리스크가 낮다고 판단하는 사업에만 국한하여 참여한다.
2. 주주이익을 최우선 고려하여 사업의 이익 극대화에 노력을 집중한다. 따라서, 위험이 적은 코스트 정산이나 EPCM방식의 계약을 선호한다.
3. EPC 럼섬 턴키의 비중을 줄이고, 대형프로젝트에 대한 FEED (기초설계)와 PM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참여를 확대한다.
4. FEED와 PM을 수행하면서 얻은 발주자와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동력 및 간접시설의 수의 계약을 적극 추진한다.
5. 재해예방 및 복구사업, 재활용, 환경시장 등에 대한 진출확대를 강화한다.
6. 해외사업을 늘리고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인력 풀 활용과 리더양성에 주력한다.
이상과 같이 플루어는 약 100년 동안 경기침체 시기와 시시각각 변화하는 경영환경에 적극 대응하는 초대형 글로벌 기업으로의 전환을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세계 엔지니어링업계의 대부로서 불멸의 리더라는 비전을 갖고 지금도 이익을 쫓아 변신하고 있다.
(최초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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