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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플랜트 시장의 진검 승부처, 사우디아라비아

조성환 2022. 4. 3. 14:12

글로벌 플랜트 시장의 진검 승부처, 사우디아라비아

-2022년 사우디아라비아 오일/가스 플랜트 프로젝트 동향-

 

 

조성환

                                                                 플랜트프로젝트컨설팅 대표

 

1. 오일달러로 넘쳐나는 나라

 

1930년대, 당시 세계 최강인 대영제국은 자기네들이 식민 통치하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기름이 나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우디아라비아는 1932년에 왕국으로 독립하였으며, 6년이 채 지나지 않아 석유가 발견되었다. 만약 영국의 식민지 하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면 지금의 사우디가 아니라 지옥문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1938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최초의 석유가, 1951년에는 세계 최대의 유전이 발견됐지만, 그 혜택을 온전히 받아 부자가 되기까지 20년 이상을 기다려야만 했다.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인 오펙(OPEC)이 만들어지면서 세계 석유 공급의 주도권은 미국과 영국에서 중동으로 넘어왔다. 드디어 중동의 이슬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에 입김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동 산유국들의 유전개발 경쟁으로 1960년대의 석유 생산량은 1950년 대비 3배이상이 늘었다. 1960년부터 1973년까지 OPEC은 석유 생산량을 매년 10% 늘리면서 드디어 세계 공급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드디어 중동이 세계 유전개발 사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973년 석유가 무기화되어 유가가 100% 이상 뛰면서 중동의 큰 형님 격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돈 벼락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사막과 이슬람 성지, 그리고 유목민이 전부였던 절대 왕국이 순식간에 부자 나라로 변해 버렸다. 사우디에는 돈이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건설업체들이 사막의 오랜 친구들인 양 사우디 왕국으로 몰려왔다. 한국도 1973년 사우디에서 최초의 도로공사를 수주하면서 그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열사의 나라로 가기 시작했다. 한국 건설업체에 고용된 수많은 근로자들이 지금의 인도인처럼 돈을 벌러 사우디로 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를 보유하면서 부자가 된 나라 답게, 사우디아라비아는 건설공사와 더불어 수많은 플랜트 프로젝트를 쏟아냈다. 중동에서 발주되는 오일과 가스의 플랜트 프로젝트 투자비 중 사우디의 비중이 40%에 달한다. 그렇게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세계의 내노라 하는 모든 업체들에게 엘도라도가 되었다.

 

 

2. 한국 EPC업체의 사우디 시장 진출

 

1997년 말, 한국이 IMF 외환위기 하에서 신음할 때, 오일머니로 풍요로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플랜트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2000년대 초 사우디에서는 매년 20억~30억 달러 규모의 유전개발, 정유공장, 석유화학 플랜트 프로젝트가 발주되고 있었다. 그곳은 유럽, 미국, 일본 업체들의 무대였지만, 한국 EPC업체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한국이 1973년부터 토목공사로 진출한 사우디아라비아는 해외건설에서 제1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큰 건설시장이었다. 그러나 토목, 건축과 같은 단순 건설공사에서 탈피하여 고부가가치의 플랜트 EPC를 수주하기까지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으며 시간이 걸렸다.

 

삼성엔지니어링이 사우디로 가는 길을 가장 먼저 뚫었다. 정부 소유의 코리아엔지니어링을 1978년에 인수한 삼성엔지니어링은 다른 그룹에 비해 후발 주자였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공략을 시작했다. 드디어 2001년 10월에 삼성엔지니어링이 사우디에서 PDH/PP플랜트를 3.5억 달러에 수주하면서 한국업체로는 최초로 플랜트 EPC분야에 진출했다.

 

소위 2000년대 초는 내노라 하는 한국 재벌 그룹 산하의 건설회사들이 시공에서 EPC로 전환하면서 중동으로 눈을 돌리게 된 때였다. GS건설은 카타르로, SK건설은 쿠웨이트로 갔다. 삼성엔지니어링의 뒤를 이어 GS건설이 2004년에 카본블랙 플랜트를 5천만 달러에 수주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들어왔다. 이어 2005년에는 대림산업이, 2006년에는 현대건설이 사우디 플랜트 EPC시장에 상륙했다. 그러나 아직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업체들에게는 낯선 나라였으며 진입 장벽이 높았다.

 

스페인의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가 주력 시장을 중남미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바꿔 2003년에 처음으로 상륙했다.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는 아람코 정유공장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한국의 최대 경쟁상대가 되었다. 그렇게 후발업체들 모두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미래의 주력시장으로 삼으며 공격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래프-1. 사우디 연도별 오일/가스 플랜트 EPC프로젝트 발주 규모

 

3. 한국 EPC업체의 활약상

 

역설적으로 2001년의 9.11 테러는 한국에게 기회를 선사했다. 2003년 3월 미국의 승리로 끝난 이라크와의 전쟁 후, 유가는 계속 상승하면서 다시 사우디에는 돈이 흘러 넘쳤다. 그야말로 2005년의 사우디는 사상 최대의 호황 그 자체였다. 그전에는 매년 평균 25억 달러 규모로 발주되었던 사우디의 플랜트 EPC시장이 2005년과 2006년에는 전년도 대비 10배 이상 폭발적으로 뛰면서 플랜트 업계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한국 EPC업체들의 사우디 플랜트 시장을 향한 꾸준한 영업활동은 2005년도에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삼성엔지니어링이 에틸렌 크래커를 포함한 3개의 석유화학 플랜트 프로젝트를 18억 달러에 수주하면서 드디어 포문을 열었다. 삼성엔지니어링은 테크닙, 사이펨,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에 이어 수주 금액 랭킹 4위를 기록하였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EPC플레이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대림산업도 사하라 PDH/PP플랜트 프로젝트를 3.3억 달러에 수주하면서 초기 진입에 성공했다.

 

2006년에도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발주가 이어 나갔다. 삼성엔지니어링은 2006년에도 17억 달러를 수주하여 기염을 토했으며 현대건설은 쿠라이스 유전개발 프로젝트를 7억 달러에 수주하면서 사우디 땅에 첫발을 디뎠다. 사우디에 진출한 EPC업체들에게 2005년은 전년 대비 10배나 많은 발주 물량으로 수주 목표를 초과 달성한 해였으며, 인력이 부족해 수주를 자제하는 입장이 되었다. 소위 셀러마켓 위주의 골라 먹는 시장으로 변한 것이다. 한국업체들은 영원할 것만 같은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

 

드디어 2007년에는 사우디에서 한국 EPC업체의 시장 점유율이 43%에 이르렀다. 삼성엔지니어링과 대림산업이 사우디의 카얀석유화학 콤플렉스 프로젝트에서 각각 20억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리면서, 한국업체가 테크닙, 스남프로게티, 테크니몽, 플루어, JGC 등을 앞지르게 되었다. 2008년 초에는 GS건설이 아람코 마니파 프로젝트를 5억 달러에 따내면서 본격적으로 사우디에 터를 잡았다. 스페인의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만이 한국과 맞서고 있었다.

  

그래프-2. 한국 EPC업체의 사우디 플랜트 프로젝트 시장 점유율

그러나 2008년 하반기에 불어 닥친 미국 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산유국 중동을 강타하면서 수많은 대형 프로제트가 연기 혹은 취소되기 시작했다. 이 금융위기는 중동의 건설시장을 순식간에 셀러 마켓에서 바이어 마켓으로 바꿔 놨으며 EPC업체들을 코너로 몰았다. 사우디는 이 기회를 틈타 싼 가격으로 플랜트를 건설하기 위해 초대형 프로젝트들을 더 많이, 더 빠르게 진척시켰다. EPC 가격을 낮추기 위해 입찰 조건을 완화해 주면서 업체간 치열한 경쟁을 유도했다. 한국업체가 주 타겟이었다.

 

한국업체들은 사우디의 이러한 전략에 말려들었다. 2009년의 사우디 주베일 정유공장 프로젝트에서 삼성엔지니어링, 대림산업 및 SK건설이 7개 패키지 중 4개, 금액으로는 전체의 36%에 해당하는 27억 달러를 수주했다. 오일머니를 차지하기 위한 전 세계 EPC업체들의 수주 전쟁에서 승자는 단연 한국이었다. SK건설도 한국의 빅5로서는 가장 늦은 2009년에 주베일 정유공장 프로젝트를 4억 달러에 수주하면서 사우디 판에 뛰어 들었다. 1980년대 사우디 병원공사에 이은, SK건설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악연이 다시 시작되었다.

 

2011년은 그야말로 한국 업체가 사우디 시장을 완벽히 장악한 해였다. 시장 점유율은 59%에 달했다. 사우디에서 발주되는 프로젝트 10개 중 6개를 한국업체가 수주했다. 사우디 아람코의 와싯 프로젝트(25억 달러)와 샤이바 프로젝트(28억 달러) 입찰에서는 우리끼리의 무모한 출혈 경쟁속에 SK건설과 삼성엔지니어링의 싹쓸이 수주로 이어졌다.

 

한국업체의 총 공세로 말미암아, 사우디의 플랜트 EPC마켓은 삼성엔지니어링, GS건설, SK건설, 대림산업 및 현대건설로 대표되는 빅 5외에 사이펨,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 페트로팩, 테크닙, 맥더모트, JGC, 테크니몽의 7개사가 살아 남아, 총 12개사가 혈투를 벌이는 판으로 변했다.

 

이에 따라 사우디에서의 플랜트 EPC업계의 판도는 10년전과는 전혀 다른 구도로 바뀌었다. 코스트플러스에 강하고 럼섬 계약에 약한 미국의 벡텔, 플루어, 포스터휠러, KBR 등은 PMC와 FEED에서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루르기, 우데, 린데 등은 EPC시장에서 물러났고 일부는 기술을 파는 회사로 변했다. 이탈리아의 스남프로게티는 사이펨에 흡수되었으며, 치요다와 도요엔지니어링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4. 한국 EPC 업체의 몰락

 

2013년이 되면서, 그 동안 소문으로만 나돌던 저가수주로 인한 손실이 사실로 알려지면서 한국을 들끓게 했다. 삼성엔지니어링, GS건설, SK건설의 3사가 대규모 손실을 발표하면서 업계에 충격을 주었다. 소문에서 비껴갈 것으로 여겨졌던 대림산업 마저도 2013년 4분기에 사우디 프로젝트를 포함해서 손실이 발생했다. 결국 한국업체들의 대규모 손실이 2013년과 2014년도의 회사 재무제표에 반영되면서 온 세상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2014년은 한국 EPC업체가 쇠락으로 가는 길을 시작하는 첫 해가 되었다. 그러나 몰락의 징후는 그 이전인 2012년 사우디의 지잔 정유공장 프로젝트 입찰에서 나타났다. 전체 7개 패키지 중 SK건설을 제외한 나머지 한국의 빅4가 모두 수주에 실패했다. 그렇지만 SK건설은 와싯 프로젝트에서의 대규모 손실로 말미암아 지잔 정유공장 프로젝트를 끝으로 더 이상 사우디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 업체의 사우디 내 시장 점유율은 그 이전의 40% 대에서 10%대로 떨어졌다. 한국 EPC업체의 쇠락기였다. 한국의 빅5는 이제 수주 영업보다는 기존에 따낸 악성 프로젝트의 손실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해야 했다. 그래서 입찰을 자제하면, 수주가 적어지고 그러면 백로그가 줄어들면서,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을 벌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반면에 당시 한국업체와 같이 경쟁했던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와 페트로팩은 한국의 빈 자리를 차지하면서 최대 전성기를 구가했다.

 

 

5. 사우디 플랜트 시장의 EPC강자들

 

1970년 대부터 1990년 대까지의 사우디의 플랜트 프로젝트 시장은 우리에게 옛날 이야기에 가깝다. 사우디에서의 가장 큰 발주처인 아람코는 1974년 이전에는 미국계 회사였다가 1980년에 이르러서야 사우디 정부가 주식 100%를 취득하면서 완전 국유화가 되었다. 이 시절, 정유공장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스남프로게티, 일본의 치요다, 미국의 포스터휠러가 맡았다. 그리고 석유화학 플랜트 프로젝트는 미국의 플루어와 ABB러머스, 이탈리아의 테크니몽, 일본의 도요와 치요다가 지배하고 있었다. 유전개발을 포함한 업스트림 프로젝트는 스남프로게티, 프랑스의 테크닙, 일본의 JGC가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있었다.

 

표-1. 사우디 내 시기별 상위 글로벌 EPC업체 리스트

2001년 한국업체의 진입에 이어, 2011년에 전성기를 찍고, 쇠락의 길로 가기 직전의 2014년까지 총 14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에겐 애증의 텃밭이었다. 한국업체들은 평균적으로 매년 14억 달러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사우디와 한국을 달궜다. 2001년에서 2014년까지 유럽업체와 한국업체간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유럽에서는 사이펨, TR, 페트로팩, 린데, 테크닙 등의 5개사와 한국의 빅 5(삼성엔지니어링, 대림산업, SK건설, GS건설, 현대건설)가 맞붙었다. 이 14년 동안 사우디의 격렬한 플랜트 시장에서 한국 업체들은 유럽 다섯 개나라의 대표주자들과 싸우는 동시에, 아국 업체끼리의 묻지 마 경쟁도 일어났다. 이 시절 사우디에서의 수주 순위 탑 5는 사이펨, 삼성엔지니어링, 대림산업,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 SK건설 순이었다.

 

한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쇠락의 길을 걸었던 2015년부터 2018년까지 4년 동안, 한국의 빈 자리를 유럽과 인도, 그리고 주변의 아랍업체들이 차지했다. 이 당시 스페인의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가 영예의 1위를 차지하고 맥더모트와 사이펨이 뒤를 이었다. UAE의 NPCC와 페트로팩, 인도의 L&T, 터키의 테크펜 등이 등장했으며, 한국업체 모두는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2019년이 왔다. 사우디에서 경기가 살아났다. 원유와 가스 생산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역사상 가장 최대 규모인 260억 달러가 계약되면서 단숨에 중동 최대의 시장임을 각인시켰다. 13년 전의 최대 호황기에 버금갈 정도였다. 삼성엔지니어링과 현대건설이 긴 휴지기를 보내고 사우디 문을 다시 두드려 모처럼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터졌다. 이제부터는 위기에 강한 업체만이 살아남아 과실을 독식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EPC업계의 재개편이 일어났다.

 

지난 3년 동안 사이펨이 사우디에서의 업스트림 프로젝트에 92억 달러의 수주로 1위를 했지만, 큰 손실로 휘청거리고 있다. 사이펨은 2020년에 13억 달러, 2021년에는 26억 달러의 손실을 각각 기록했다. 스페인의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는 31억 달러를 수주했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2021년에 2억 달러 규모의 손실이 발생했다. 한국과의 경쟁 속에서도 이익을 냈던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는 결국 코로나19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반면에 인도를 대표하는 L&T는 37억 달러를 수주하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19는 사이펨과 테크니카스 리유니다스를 어렵게 했지만, 유럽과 일본의 전통 강호인 테크니몽과 JGC는 아직도 건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삼성엔지니어링과 현대건설이 37억 달러와 32억 달러를 각각 수주하면서 2강 3약 구도를 만들어 냈다. 한국의 대림산업은 DL이앤씨로, SK건설은 SK에코플랜트로 이름이 바뀌면서 사우디에서의 흔적은 더욱 바래졌다.

 

 

6. EPC업체의 춘추 전국시대

 

EPC는 종합 기술의 결정체라고 한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와 통신의 발달로 이제 EPC는 어려운 사업이 아닌 게 되어 버렸다. 이제 중동에서의 EPC 실력은 모두가 다 평준화되었다. 더구나 자국의 산업, 인력, 업체 등에 대한 우대 정책에 따라 현지의 대형 건설업체들이 EPC로 속속 진입하고 있다. 사우디 내에서 EPC업체의 주도권은 먼 옛날 미국과 유럽 업체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2010년에 한국을 거쳐 서서히 인도와 중국 업체로 바뀌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현지업체들이 주도할 것이다.

 

한국이 4년전에 EPC에 눈을 떴듯이, 아라비아 반도를 둘러 싼 주변 업체들이 사우디 플랜트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인도의 L&T는 중동에서 발주되는 파이프라인 공사를 거의 도맡아 하면서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가 되었으며, 이제는 프로세스 플랜트의 EPC에 진입하면서 한국업체의 대항마로 자리잡았다. 터키의 테크펜은 1981년에 사우디에 상륙하여 파이프라인과 저장탱크 등의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의 아키로돈은 1967년부터 사우디 항만 공사에 참여해왔으며 업스트림 분야의 플랜트 프로젝트에서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중동 최대 건설사인 레바논 계의 CCC는 EPC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집트의 국영엔지니어링 및 건설기업인 엔피와 페트로젯은 이미 2000년에 사우디 아람코의 플랜트 분야에 진출한 이후, 꾸준히 프로젝트를 따내고 있다.

 

GCC 회원국 중에서는 80년 이상의 역사를 지속해온 레바논 계의 CAT그룹과 UAE의 타겟엔지니어링이 사우디 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을 올리고 있다. 또한 사우디 최대 종합 건설사들인 사우디 오거, 네스마 앤 파트너스, 나세르 알하지르 등이 현지업체 보호 정책에 힘입어 EPC분야로 진입하고 있다. 사우디 수출 석유의 25%이상을 수입하는 중국은 최대 고객으로써 사이노펙, 위손, HQC, CPECC, CPPE, CPPB 등의 플랜트 EPC업체들이 줄줄이 사우디를 공략하고 있다.

 

이제 사우디아라비아의 플랜트 시장은 전세계에서 몰려든 모든 EPC 업체의 최대 격전장이 되었다. 유럽, 일본, 한국의 10개 플레이어 외에도 아라비아 반도 주변의 5개 업체, 중동과 사우디의 5개 현지업체, 중국의 6개 업체 등 약 30개 플레이어가 플랜트 EPC시장에 포진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며, 벤더와 플랜트 서비스 업체, 그리고 기술자들에게는 새로운 고객을 맞는 신세계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7. 그린수소 수출 잠재력 1위의 국가

 

그린수소는 지구를 온난화에서 구할, 종국적으로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연료다. 세계는 그린수소의 패권을 둘러싸고 두개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린수소를 수출하는 나라와 그린수소를 수입하는 나라다. 그린수소를 수출할 수 있는 나라는 강한 바람이 부는 바다나 하루 종일 햇볕이 내려 쬐는 사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열사의 나라 중동이며, 그 한가운데 축복받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다. 알라는 사막 밑에는 석유를, 위에는 햇빛과 바람을 선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크기가 180만 평방 킬로미터로 남한 전체의 18배나 되는 사람이 살지 않는 거대한 사막이 있다. 그곳에는 풍부한 태양과 바람의 자원이 있으며, 담수화공장을 건설해 충분한 물공급이 가능하다. 그리고 내수가 작아 그린수소 대부분을 수출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유럽이나 아시아에 수출하기 좋은 지리적 위치에 있다. 그래서 사우디는 세계가 인정하는 그린수소 수출 잠재력 1위의 국가다.

 

표-2. 그린수소 밸류 체인

그렇게 사우디는 세계 1위의 수소 생산국이 되고자 목표를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첫 번째 시도가 바로 네옴시티에 들어갈 그린수소 및 그린 암모니아 프로젝트다. 4.6GW의 풍력과 태양광의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여 일산 650톤의 수소와 연산 120만 톤의 암모니아 플랜트를 홍해의 네옴 시티에 건설하는 50억 달러 규모의 사업이다. 2022년 초에 착공에 들어가 2026년 상반기 운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우디는 이 프로젝트를 표준으로 삼아, 향후 수많은 복사 플랜트를 만들어 그린수소와 그린 암모니아를 수출하고자 한다.

 

이제 사우디의 드넓은 사막에는 대규모 태양광과 풍력발전단지가 그린수소 생산을 위해 들어선다. 수전해시설에 물을 공급할 담수공장이 필연적으로 건설되며, 그린 암모니아로 전환하기 위한 공기분리시설도 들어선다, 또한 대용량의 수출을 위해서는 수소를 액화시켜야 하며, LNG의 밸류 체인과 유사한 길을 가게 된다. 앞으로 사우디에서의 그린수소는 이제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키는 것이며, 지구 온난화 대응과 한정된 시간으로 플랜트 시장의 블루오션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는 그린수소를 수입하는 나라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그린수소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린수소 프로젝트를 향한 EPC 헤게모니 싸움도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이후의 시기와 에너지 전환기에는 모두가 출발선 상에 서있다. 그리고 위기와 전환기에는 항상 플랜트 호황 국면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호황기에서의 과실은 언제나 기회를 노리고 자리를 지킨 업체들의 것이었다.

 

 

8. 사우디 플랜트 시장 향후 전망

 

지난 10년간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오일/가스 플랜트 EPC 프로젝트의 연간 평균 발주 규모는 130억 달러 대였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오기전인 2019년에는 260억 달러가 계약되어 피크를 찍었다. 코로나19의 영향을 받은 첫해인 2020년은 전년도 대비 18% 밖에 안되는 47억 달러로 폭삭 주저 앉았다. 코로나19의 두 번째해인 2021년에는 전년도 대비 90%가 넘는 90억 달러가 발주됐으며, 이는 연 평균 발주금액 130억 달러의 70%까지 회복됐다.

 

코로나19가 오미크론으로 약해지면서 2022년의 사우디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가고 있다. 벌써 1분기 말 기준으로 83억 달러가 계약되었다. 2022년 전체로 봤을 때 120억 달러, 2023년에는 140억 달러 규모의 발주를 예상하면서 코로나19 이전의 정상궤도로 돌아가고 있다.  

 

2022년의 가장 큰 육상 가스플랜트인 줄루프 프로젝트를 일본의 JGC가 한국업체의 경쟁을 꺾고 지난 2월 30억 달러에 수주하면서 옛 영광을 되찾았다. 지난 1월 45억 달러에 계약된 줄루프 해상 프로젝트에는 UAE의 NPCC가 22억 달러를 수주하면서 신예의 다크호스로 등장했다. 세계 최초의 그린수소 대형사업인 50억 달러의 네옴 그린수소 프로젝트가 오는 4월에 건설공사를 시작한다.

 

2023년에는 미국 겐오일이 추진하는 50억 달러 규모의 중질유 업그레이드 콤플렉스가 발주될 예정이다. 또한 아람코가 BOO방식으로 추진하는 20억 달러의 동부유전지대 탈황 프로젝트도 구체화된다. 석유화학 프로젝트로는 아람코와 토탈에너지스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90억 달러 규모의 아미랄 석유화학 프로젝트가 계획되어 있다. 아울러 저유가로 잠시 지체되었던 아람코와 사빅이 발주하는 250억 달러의 얀부 정유-석유화학 통합 콤플렉스 프로젝트도 재 평가되면서 2024년에는 가시화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즉, 사우디아라비아는 전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메마르지 않는 플랜트 프로젝트 시장이다. 석유 대국인 만큼, 석유 및 가스전개발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것이며, 그 다운스트림인 석유화학 분야에도 막대한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석유 수출을 다변화하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 사우디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여 생산되는 대규모 블루수소에 대한 글로벌 공급 업체가 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왕국의 풍부한 태양열과 풍력 자원으로 그린수소 수출 세계 1위에 서기 위해 선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공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사우디 아람코는 지금의 원유생산을 8% 확대하고, 가스는 50% 이상의 증강을 목표로 함에 따라 플랜트 투자가 급격히 늘어날 전망이다.

 

 

9. 사우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2000년대부터 한국 EPC업체들의 플랜트 수주가 급증하며 급기야 2차 사우디 붐이 이어졌다. 10개가 넘는 한국의 EPC업체들이 참여하여 사우디에서 거대한 수주고를 올렸으나 결과는 비참했다. 그래서 사우디는 한국업체의 무덤이라고 했다. 2013년 실적쇼크로 끝난 대부분의 손실 현장은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사우디에 진출한 모든 한국 EPC업체가 해당되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그 이후로 한국 EPC업체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사우디에서 활동했던 10개의 EPC 업체 중 지금은 두 개만 남아 활동하고 있다. 나머지 업체들은 경험, 실적, 관리능력, 현장 노하우, 인적 네트워크 등의 무형자산을 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떠났다. 코로나19가 닥치면서 더더욱 사우디는 멀어졌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플랜트 건설 시장은 중동이며, 중동에서 가장 큰 시장은 사우디아라비아다. 아직도 수많은 유럽, 미국, 일본의 글로벌기업과 주변 국가에 위치한 이집트, 터키, 그리스, 인도 기업들이 몰려오는 이유다. 더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러시아의 에너지 자원을 대체할 곳으로 중동이 떠올랐다. 사우디에게 다시 막대한 석유를 공급할 절호의 기회가 다가왔으며, 부를 안겨다 줄 것이다. 탈중동은 어리석은 말이며, 탈사우디아라비아는 약자들의 변명이다. EPC기업으로 생존하려면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고,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고자 한다면 중동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것도 다름아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는 과거와 다르게 많이 변했다. 사우디는 한국을 좋아한다. 사우디인들은 세계 첫 한류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1970년대 물결처럼 밀려온 1세대 한국 근로자와 기술자들이 사우디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한국은 가난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위태로웠지만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묵묵히 일했다. 사우디인들은 인프라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열심히, 성실하게 헌신적으로 일해온 한국인들을 잊지 않는다. 이 프로젝트들이 끝난 지 거의 40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건재하고 품질이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사우디에서 보여준 한국 건설업체의 성과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

 

그렇다, 세계 플랜트 건설시장에서 사우디만큼 한국과 가까운 나라는 없다. 사우디 왕국의 절대 권력자인 왕세자 모하메드 빈 살만은 1970-80년대를 상기시키면서 성공적인 사우디-한국 파트너쉽 경험을 쌍방의 이익을 위해 다시 살리자고 강조하고 있다. 사우디는 이제 세계 강국의 하나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은 물론 석유 의존도를 타파하고자 산업을 다양화하고 있다. 사우디는 한국을 배우려고 한다. 변변한 천연자원 없이 경제 기적을 일으키며 손꼽히는 선진 산업국가가 된 한국을 사우디 젊은이들은 배우고자 한다. 우리는 그동안 을의 입장에서 수동적이며 아마추어적으로 사우디를 대해 왔다. 사우디 사막에서 흘린 선배들의 땀이 헛되지 않도록, 과거와는 다른 각도와 다른 전략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전방위적 사업을 펼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끝

 

(상기는 해외건설협회에서 2022년 3월 31일에 발간한 2022년 1분기 “K-BUILD저널 심층 이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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