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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라비아의 유향 무역로 (2편) 본문

아랍 이야기

고대 아라비아의 유향 무역로 (2편)

조성환 2013. 12. 29. 23:13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


 #36. 땅이 꺼진 것 같은 네게브 사막

페트라를 지나면마지막 사막지대인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Negev) 사막으로 들어간다땅이 꺼졌다고 할 정도의 네게브 사막이다온길과 가야할 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와디가 펼쳐진다와디야 말로 카라반들에게는 사막의 아스팔트다이 사막에서 최소 이틀은 걸어야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다네게브 사막에서는 모든 것이 뜨거운 태양에 달구어 진다비가 오지 않고 한 여름에는 풀 한 포기 나지 못한다.



 #37. 카라반의 휴식처

사막의 모래 언덕위에는 카라반들이 돌을 쌓아 만든 휴식처 겸 숙소가 있다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도적들로부터의 안전이었다그리고 건기에 사용하기 위해 11월에서 3월까지 4개월 동안 내리는 비를 모았다여기서 물을 보충한 카라반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카라반들은 사막 곳곳에 물과 곡물 저장소를 두었는데 그 위치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가문을 이어오는 이 비밀은 곧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이었으며 사막의 항해사라 불리는 베드윈족의 기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38. 한낮에는 카라반과 낙타도 이동을 멈추고 낮잠을 잤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이때만큼 카라반도 이동을 멈추고 낮잠을 잤다단순히 피로 때문에 휴식을 취하는게 아니라 이것 역시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이 낮잠 자는 시에스터(Siesta)문화가 바로 카라반들이 만들어낸 것이다지금의 남부 지중해 사람들이 시에스타를 즐기는 것은 완전히 아랍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39. 다양한 낙타고기 요리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카라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먹을 거리였다식량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힘없는 낙타를 잡아 고기를 마련했다굽고 끓이고 키라반에 의해 낙타 요리법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유향 무역을 위해 운송 수단으로 사용했던 낙타가 식량이 되는 것이다낙타 한마리에서 나온 고기는 대략 보름치였으며 남는 고기는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온갖 방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이것을 말리거나 훈제하거나 염제하거나 모래에 찌거나 또는 뜨거운 양념을 바르거나 하는 인류가 만들었던 다양한 보존 음식이 본래 카라반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40. 네게브 사막의 고대도시 위치

아라비아 남부의 여러 곳에서 출발한 카라반들은 네게브 사막으로 몰려 들었다네게브 사막은 황무지란 이름을 갖고 있지만그곳에는 아브다트(Avdat), 쉬브타(Shivta), 할루자(Haluza), 맘쉬트(Mamshit)라는 4개의 고대도시들이 번성했다.

 

이 도시들은 어떻게 황무지에서 이렇게 화려한 고대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을까그건 사막에서 목마름을 해결했기 때문이다귀한 물 한 방울까지 끌어들이는 복잡한 관개 시스템을 통해 열악한 환경에 적응했다또 하나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도 작용했다카라반의 최종 목적지인 지중해 연안의 가자지구이집트와 시리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다


 

아브다트


 #41. 아브다트

카라반들이 네게브 사막으로 들어서면서 만나는 도시는 아브다트(Avdat)였다. 언덕 높이에 위치한 아브다트는 유향 무역로에 위치한 하나의 휴게소 및 체류지였다이곳에서 카라반들이 휴식을 취하고 낙타에게 물을 채워주었다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이 광활한 사막 한 가운데 그 기념물들이 우뚝 서 있는 것만 봐도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곳이었다.


 

쉬브타


 #42. 쉬브타

쉬브타(Shivta)는 네게브 사막 한복판에 있으며 오아시시는 커녕 작은 우물조차 없는 곳이었다사람들은 저수조와 수로를 만들어 우기 때 내리는 빗물을 받아 저장했다가 식수와 용수로 사용했다유향을 실은 낙타가 쉬브타에 오면 반드시 중앙로를 거쳐야 했다그렇치 않으면 목숨이 위험했다세금은 무게 단위로 매겨졌으며이를 내기 전에는 더 이상의 운송이 허용되지 않았다쉬브타는 네게브 사막에서 가장 큰 나베테안의 주거지로 2,000명의 주민이 살았고 수백년 동안 번성했던 도시였다.


 

할루자


 #43. 할루자

아브닷에서 40킬로미터쉬브타에서 20킬로미터를 더 가면 네게브 사막지대를 관리했던 할루자(Haluza)가 나온다엘루사(Elusa)라고도 불린다가자항구에 닿기전 대상들이 쉬어가던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다할루자는 모래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어 도시가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으나쉽게 지하수를 캘 수 있었으며 가자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 인해 행정도시로 발전했다이 도시 대부분의 유적지는 아직도 사막에 묻혀있다


 

맘쉬트


 #44. 맘쉬트

페트라에서 가자로 가는 또 다른 루트는 4만 평방미터의 작은 마을 맘쉬트(Mamshit)유목민 나바테아인들은 맘쉿을 향료의 길로 통하는 정거장으로 만들었다맘쉬트에는 물이 없었는데 겨울에 지하수와 빗물을 받아 놓았다이 빗물을 카라반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다카라반은 이곳에 들려 갈증을 해결했고이 도시는 카라반에 물을 팔아 벌은 소득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카라반의 경제학


 #45. 사막에서의 카라반 행렬〈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1824-1904)의 그림〉

2,400-3,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유향 무역로 여행에는 대략 6개월이 소요되었다낙타 행렬의 카라반들은 더딘 속도로 행군하여 65군데의 휴식터를 통과하면서 몸을 쉬고낙타를 돌보았으며 다음날을 위해 힘을 모았다이 때에는 교통도로 또는 지도 없이 긴 낙타 행렬을 한 카라반이 강도약탈자그리고 편협한 통치자의 핍박을 받으면서 어렵게 무역을 했다카라반들은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속 돈을 뿌려야 했다어느 곳에서는 물을 먹기 위해다른 곳에서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돈을 내야 했으며곳곳마다 수많은 종류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46. 카라반〈프랑스 화가 찰스 테오도르 프레르, 1814-1888의 그림〉

카라반끼리의 치열한 경쟁도 벌어졌다이게 또 속도 경쟁이니까 하루라도 빨리가야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빨리 갈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동해간다경쟁자보다 하루라도 빨리가서 시장을 선점해야했기 때문이다.

 

반면 그 덕분에 유향 무역로에 위치한 아라비아의 도시들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카라반 역시 마찬가지였다유향무역으로 카라반이 적게는 100많게는 2,000배까지 이익을 얻었다낙타 한마리가 실을 수 있는 유향의 양은 대략 200킬로그램인데유향이 금과 같은 무게로 거래되었다고 하니 실로 그 금액은 엄청났다낙타 20마리가 운반한 유향 4,000킬로그램의 값은 구매력평가지수르 계산하면 현 시세로 무려 560억 원이나 되었다.



 #47. 장터 〈이탈리아 화가 알베르토 피시니(1826-1899)의 그림〉

지중해에도 이르기 전에 비용이 낙타 한마리당 688데나리우스에 이르렀다고 한다. 1 데나리우스(성경에서는 데나리온)는 로마제국에서 통용되던 은화로 약 4그램 정도이며 당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알려져 있다이런식으로 계산하면낙타 한마리의 세금이 일반 노동자의 2년치 월급이 된다. 20마리의 낙타로 이동할 경우 일반 노동자의 40년치 월급을 세금으로 냈던 것이다.


 

유향 무역의 종착지가자


#48. 유향 무역로는 가자에서 끝난다.

수천킬로미터를 달려 온 귀중한 유향은 가장 비싼 값에 팔기 위하여 마지막 종착지인 가자(Gaza)에서 거래되었다가자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지역적 중요성으로 인해 유향 무역로의 종착지가 되었으며 항구로 발전했다유향은 가자에서 다시 알렉산드리아와 다마스쿠스메소포타미아로도 퍼져나갔다.



 #49. 낙타의 최후카이로의 임바바(Imbaba) 낙타시장

주인과 함께 2,000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온 낙타는 대장정을 끝내고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면 종말을 고한다쇠약하거나 다리가 부러진 낙타는 운송수단으로서의 역할이 끝나면서 고기로 팔려 나가 주인에게 마지막 충성을 다한다수백마리의 낙타가 매일 이집트의 임바다(Imbada) 시장에서 거래되어아랍 음식인 샤와르마(Shawarma)나 케밥으로 변한다.


 

유다 왕국

 

#50.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 (1518-1594)가 그린 솔로몬과 시바 여왕국제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이용하여 솔로몬은 성전을 건설할 수 있었다.

기원전 990년경에 이 카라반 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해 막강한 제국을 건설했던 나라는 바로 고대 이스라엘의 왕국유다 왕국이었다유다 왕국은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이 일대 대부분의 무역로를 장악했다이 시대 예루살렘은 외국제 수입상품들로 넘쳐났으며 수많은 외국상인들이 북적대는 국제적인 메트로폴리스였다우리가 알고 있는 시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간 이야기는 이 시기에 생긴 것이었다.

 


이집트


 #51. 네바문 무덤 벽화 그림, 축제에서 미녀 연주자들이 향수가 들어간 고깔형의 장신구를 머리에 얹고있다.

이집트에서 유향은 명품의 상징이었다귀족들은 다양한 향기에 탐욕했다향 냄새가 오랫동안 몸에서 풍겨날 수 있도록 특별한 향수까지 고안해냈다그건 머리에 얹고 다닐 수 있는 향수였다고깔 모양의 향수는 지위가 높은 사람상류층이 축제나 축하의식때 썼다고깔모양의 향 혼합물이 녹으면서 좋은 향기가 퍼져나갔다체온이 서서히 녹기 때문에 지속력이 강했던 고체 향수이 향수로 치장하고 모여 서로의 향 냄새를 맡는 것이 당시 상류층 사회의 문화였다.

 

또한 향은 이집트 신전에서 신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미라를 만들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였다모든 종교의식엔 유향이 피어 올랐고수천년이 지나도 변치않는 미라가 탄생했다.



#52. 기원전 41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의 만남〈영국 로렌스 앨머 테디마 경(1836-1912)의 유채화〉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는 클레오파트라의 매혹적인 향수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클레오파트라는 손을 부드럽게 하고 손에서 향이 나도록 하기 위해 400데나리온(당시 성인 1인 하루 임금이 1데나리온 이었음이라는 막대한 돈을 주고 향료를 구입해 사용했다고 한다그녀는 온몸에 향을 뿌리고 시이저를 유혹했다 제국은 그녀의 차지가 되었다이어 달콤한 향으로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를 유혹한다상상을 초월한 향수를 사용해 성적매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썼다안토니우스는 단숨에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져버렸다.


 

로마 제국의 유향 소비


 #53. 로마의 공중 목욕탕〈프랑스 화가인 위베르 로베르 (1733-1808)의 그림〉

가자 항구에 도착한 대상들은 유향을 지중해너머 그리스와 로마로 향하는 배에 실었다. 유향은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사원의 향으로 쓰였으며 의약품과 미용을 목적으로 한 용도로도 엄청난 양이 쓰였다아울러 로마에는 900개가 넘는 목욕탕이 있었을 정도 향이 소모되는 목욕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로마의 여인들은 유향의 향 즐겼다.



#54. 로마의 은화

남부 아리비아 생산지에서의 유향 가격은 파운드(450그램 6데나리우스였다카라반들은 아라비아 남쪽 끝에서 가자까지 여행비 20%와 하역비 및 관세 25%,  45%의 운반비를 내야만 유향을 로마로 보낼 수 있었다왕국의 통치자들도 항구나 국경지역에 설치된 통관지역에서 교통세금을 받아 갔다도로나 다리를 건널 때도 돈을 냈으며지방의 촌장들도 통행세를 요구하였다이렇게 도처에서 요구하는 세금과 위험 때문에 유향은 비싼 값에 팔릴 수 밖에 없었다.



 #55. 유향을 채취하는 장면 그리고 카라반 행렬

또한 카라반들은 유향 생산지와 무역로를 독점하면서 유향을 소재로 한 여러가지 전설을 만들어 냈다유향 나무는 날개가 달린 화려한 색갈의 푸른 뱀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가까이 갈 수 없으며숫소의 가죽을 쓴 남자가 여러 가지 기술을 구사해야만 겨우 채취할 수 있다고 소문을 냈다높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유향의 생산지를 비밀에 부쳤으며신비라는 베일로 포장해 부가가치를 덧붙이면서 비싸게 강매하는데 성공하였다.



 #56. 로마군은 전쟁을 하기 전에 견고한 캠프를 먼저 지었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제국의 연간 총 예산은 4억 세스테르티우스(Sesterces, 옛 로마의 화폐단위, 1데나리우스=4세스테르티우스)였다그런데이중 4분의 1이 동방으로부터 물품을 수입하는데 소비되었으며또한 이 동방 물품의 반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넘어 온 향료였다이러한 무역 불균형으로 인해 로마는 막대한 금과 은을 지불해야 했기에 경제 불황이 오기도 했다로마는 유향을 운반하는 이들을 통해 유향의 생산지를 알아내 차지하려고 애썼다실제로 군대를 보내 나즈란을 점령한 후 남쪽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험준한 사막이 이들을 막았다.


 

로마의 공격


 #57. 로마군의 팀나 정복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5년경 아라비아 반도 끝에 있는 행운의 아라비아를 진격하려고 시도했다그 원정에 파견된 병력은 2개 군단도 안되는 소규모였다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에 상륙을 하였지만 사바 왕국의 수도인 마리브까지 사막을 행군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어쨌든 300킬로미터를 행군하는 데 무려 6개월이나 걸렸다그 때문에 마리브 성벽 앞에 이르러서도 공격할 여력이 없어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로마는 홍해의 북부 3분의 1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그리고 세관을 설치했다로마의 관세는 본국에서는 5%, 저개발 지역인 갈리아에서는 1.5%였지만동방에서 들어온 고급품에 대해서는 무려 25%나 되는 관세가 부과되었다



 #58. 페트라에 남아있는 로마식 원형 극장

결국 유향 무역로를 차지하기 위한 침략전쟁이 끊이지 않았다전 세계가 석유처럼 당시에는 유향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강대국들은 유향을 차지하려고 무역로를 둘러싼 숱한 전쟁들이 벌어졌다최후의 승자는 로마였다그 결과 유향 무역로의 역사는 뒤안길로 사라졌고 고대도시들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전설이 되었다그 자리엔 로마 제국의 문화가 이식되었다.


 

유향 무역로의 주인공이었던 카라반


 #59. 고대 무역로의 주인공 카라반〈프랑스 화가 찰스 테오도르 프레르, 1814-1888의 그림〉

당시 남부 아라비아는 유향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그리고 그리스로마아랍 및 페르시아 등 전 세계에 공급하고 있었다아라비아 반도 남쪽 끝에서 지중해까지 가는 길은 황량한 사막위험한 도적왕궁이 있는 이국적인 오아시스를 거치는 인류 최초의 위대한 무역로였다그 길을 통해 불모의 땅 사막에서도 찬란한 문화가 꽃 피웠다아랍의 카라반들이 개척했던 무역로는 잊혀진 전설이 되었지만거기에는 위대한 발견과 탐험도 있었다.



 #60. 카라반 노인의 주름에는 사막에 대한 모든 경험이 담겨져있다.

당시의 카라반은 거대 상인이었으나도적 떼들과 싸우는 강한 전사이기도 했다이동성이나 변화가 전무하던 세상에서 카라반은 일탈한 개체였고 끝없이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였다다양한 요리법을 발명한 요리사였으며 토목건축가이기도 했다모험을 즐기는 여행가이면서 천문학자와 시인이었다카라반이 다녔던 길은 수많은 이들의 삶을 바꿔놓았다때론 국가의 운명도 좌지우지했을 정도였다.


 

육상 무역로의 쇠락그리고 해상 무역로의 시작


 #61. 고대 이집트 이래 가장 큰 항구 중의 하나로 화려했던 알렉산드리아항

1세기경 로마가 무역로를 장악하고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무역로에 의존했던 사막의 도시 국가들은 점차 쇠락해갔다로마인들은 카라반을 거치지 않고 직접 유향 생산지로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로마 제국이 계절풍의 비밀을 발견하고 바다를 통한 길을 개척하면서 더 이상 아라비아 반도를 통한 무역로가 필요없어 졌다그 결과 홍해를 가로 지르는 바닷길이 열리기 시작했다결국 유향 무역으로 찬란했던 아라비아의 유산은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춰갔다부는 사막의 먼지처럼 사라지고 전설로만 회자될 뿐이었다.



 #62. 동서를 연결하는 새로운 해상 무역로

그러나 부를 갈망하는 카라반들의 분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사막의 유향 무역로를 개척했던 카라반들은 이제 저 바다넘어 미지의 세계로 향하기 시작했다그들의 눈에 띈 것은 동방의 향신료였다이들이 찾아낸 새로운 길은 아라비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바닷길이었다그들은 인도를 건너 중국그리고 신라까지 배를 몰았다바다위에서 펼쳐졌던 이들의 새로운 모험은 다시 역사를 만들어 냈다바로 목숨을 건 바다의 모험이 만들어 낸 새로운 맛의 세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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