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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이야기

고대 아라비아의 유향 무역로 (1편)

조성환 2013. 12. 29. 22:36

유향을 싣고 떠났던 카라반들의 길, 4,000년전의 무역로 

#01. 유향 무역 루트, 그길을 따라 향이 오고갔고 고대의 도시들이 번영을 구가했다.

 

4,000년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고대 문명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시절 아라비아 반도에는 이 고대 문명지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육상 무역로가 생겨났다. 유향나무가 자라는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에서부터 유향을 필요로 하는 북쪽의 지중해까지 2,400킬로미터에서 3,000킬로미터에 이르는 험난한 사막길을 낙타 대상들이 무역로로 만들어 낸 것이다.

 

 

 #02. 유향 무역로

 

유향을 싣고 이들이 떠났던 길은 메마른 대지와 높은 하늘만 있는 사막의 계곡길이었으며 쉴 곳도 먹을 것도 없는 사막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야 했다. 뜨거운 모래 폭풍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강도와 도적들로부터 유향을 지켜야 하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를 향한 열망은 이 길을 완성시키고야 말았다. 이렇게 인류 최초의 위대한 무역로는 향 때문에 생겨났다.

 

 

인류를 유혹한 매혹의 향

#03. 향은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예물이었다.

 

고대인들은 어떤 나무가 불에 탈 때 매혹적인 향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을 신의 영역이라고 믿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에게 제물로 바친 동물을 태울 때 나는 냄새를 숨기기 위해 시체에다 유향을 뿌렸다. 시간이 가면서 귀하고 신성한 것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유향은 고대 문명 사회의 제례 의식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는 연기만이 하늘에 있는 신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04. 고대 사회에서 유향이이야 말로 가장 비싼 최고의 물건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향은 신과 소통하고픈,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그리고 누구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이고 싶은 인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수단이었기에 소비는 굉장했다. 그리고 이 시기 최고의 향은 유향이었다. 당시 유향은 같은 무게의 금과 교환될 정도로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05. 뜨겁고 메마른 땅에서만 자라는 유향나무

 

하지만 유향나무는 오직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 뜨겁고 메마른 땅에서만 자라고 있었다. 줄기에 흠집을 내면 수액이 흘러내리는데 고체로 말리기까지 약 2주가 걸린다. 이것을 유향, 영어로는 프랑킨센스(Frankincense) 혹은 인센스(Incense)라고 부른다. 

 

 

 #06. 우유빛 액체가 바로 유향

 

유향나무에 흠집을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흠집은 너무 깊어도, 너무 얕아도 안된다. 우유빛 액체가 한방울, 한방울 솟아나게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액이 바로 고대인들이 가장 열광했던 유향이었다.

 

 

고대 아라비아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카라반과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었던 낙타.

 

#07. 아랍 카라반〈오스트리아 화가 루드비히 한스 피셔(1845-1915)의 그림〉

 

그리하여 유향나무가 자라는 아라비아 남부에 사는 이들에게 천금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 유향를 가자와 이집트,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가져다 팔기만 한다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십마리의 낙타를 끌고 유향을 실어나르는 이들이 생겨 나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바로 낙타 대상인 카라반이다.

 

 

 #08. 카라반에게 없어서는 안될 낙타

 

사막을 생활의 거점으로 택한 카라반에게 낙타는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낙타는 뜨거운 햇볕 아래 200킬로그램의 짐을 지고 하루에 약 40킬로미터를 걸을 수 있다. 낙타는 열악한 사막환경에 잘 적응한다.바람에 날려 오는 모래를 막기 위해 콧구멍을 여닫을 수 있으며 눈에도 별도의 눈꺼풀이 있어 심한 모래 바람도 잘 견디어 낸다.두껍고 넓적한 발바닥은 뜨거운 모래를 밟아도 견딜 수 있게 하고 모래 속으로 깊이 빠지는 것을 막아 준다. 사막의 계곡길은 낙타에게는 아스팔트 포장 도로나 다름없다.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도 견딜 수 있으며 한꺼번에 100리터를 마시기도 한다. 짚이나 마른 나뭇가지같은 사료를 먹이면 2주동안 물을 안먹어도 된다. 보통 낙타의 등에는 3분의 2정도의 상품과 나머지 3분의 1은 식량, 물, 일용품, 천막 등의 여행 필수품을 싣는다.

 

 

#09. 낙타와 새끼

 

카라반들은 출발하기 전에 여러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그중의 하나는 오랜 기간동안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낙타의 임신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한 방법으로 자궁 속에 작은 돌멩이를 삽입했는데, 이것이 수정란의 착상을 방지하고 자궁 내막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낙타의 임신을 막을 수 있었다. 자궁 내에 이물질을 넣으면 자궁점액이 혼탁해져 정자가 자궁점액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원리로 자궁 내에 루프라는 기구를 심게 되었다.

 

 

 #10. 대상이며 전사이기도 했던 카라반〈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1824-1904)의 그림〉

 

카라반은 최소 규모로 꾸려질 경우 낙타는 20마리 정도가 동원되었다. 큰 경우에는 300마리가 무리를 이룬다. 카라반의 조직은 정신적 지주인 대장과 함께 전투병, 호위병, 길 안내인, 요리사, 짐꾼, 허드렛 일꾼 등으로 구성됐다. 대장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처벌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은 예외없이 복종해야 했다. 이들은 유향이 확보되면 남보다 먼저 가기 위해 신속히 먼 길을 떠나야 했다.

 

 

 #11. 유향 무역로의 흔적

 

이 여행에는 대략 6개월이 소요되었으며 65군데의 휴식터를 통과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지만, 모든 것이 허물어져 버린 우물과 사막의 돌무더기 사이에서 역사의 흔적이 있다. 불모의 땅 사막에서도 이 땅의 모든 부를 누렸다는 도시가 있었으며, 거센 바람속에 찬란했던 옛도시의 영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이제 전설속의 고대 아라비아의 도시들과 카라반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깨어난다.

 

 

유향로의 시작점 살랄라

 

 #12. 대규모 유향나무 재배지 살랄라

 

당시 아무리 가난했던 사람에게도 부자가 될 수 있는 확실한 지름길이었던 카라반의 길. 그 먼 길의 시작은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살랄라(Salalah)에 있었다. 고대로부터 대규모 유향나무 재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13. 우바르 (땅이 꺼지기 전과 꺼진 후의 그림))

 

살랄라 부근에는 전설로만 존재했던 고대도시 우바르(Wubar) 유적지가 있다.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이곳은 미 항공우주국의 위성사진이 우바르를 찾아내는 단서가 됐다. 우바르는 4,000여년전 유향 무역로의 출발점이었던 곳이다.

 

 

 #14. 카라반들을 위한 도시 우바르

 

우바르는 그 당시 유향을 가지고 벌어들였던 모든 자본력이 결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이야기하면 뉴욕이나 런던에 못지 않은 도시였다. 남아 있는 흔적들을 더듬어 보면 우바르가 철저하게 카라반들의 거래를 위한 도시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와디 다우카(Wadi Dawkah)에서 채취한 최상급 유향들이 일단 우바르에서 최종적으로 집산되고 자본을 가진 거대 상인들에 의해 카라반이 구성되고 출발했다.

 

 

하트라마우트 왕국의 샤브와

 

 #15. 하드라마우트의 깊은 계곡

 

우바르를 포함한 남부 아라비아 각처에서 거둬들인 유향은 낙타에 실려 유일하게 개방된 하트라마우트 왕국의 수도인 샤브와(Shabwa)로 운송되었다. 샤브와는 카라반들이 우바르에서 하드라마우트 계곡을 따라 수많은 사막 도시를 거친 후 만나는 800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곳이었다.

 

 

 #16. 샤브와 유적지(카라반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였다.)

 

하드라마우트 왕국에서 밀수는 범죄 행위였으며, 낙타 대상들이 샤브와 외의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사형에 처해지는 죄로 다스렸다. 세금 형태의 십일조는 무게가 아닌 양으로 책정되었으며 하드라마우트 왕국이 믿고 있는 신을 위해 성직자에게 바쳐졌다.

 

 

사바 왕국의 마리브

 

 #17. 고대 세계의 파리로 불렸던 마리브의 유적지

 

샤브와를 출발한 카라반들은 200킬로미터를 걸어 사막 한 가운데 있는 마리브(Marib)라는 오아시스를 거쳐야만 했다. 이곳에서 카라반들은 낙타가 싣고 가는 전체 상품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세금으로 징수당했다. 왕성한 국제무역으로 사바왕국의 수도인 마리브는 고대 아랍 세계에서 가장 번창하는 부자 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고대도시 마리브는 댐에 채워진 물을 공급받는 기름진 오아시스 지대에 자리 잡고서 유향과 몰약의 독점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래서 “고대세계의 파리”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카타반 왕국의 팀나

 

#18. 팀나의 장터 유적지

 

마리브에서 동남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바위산 위에 있는 팀나(Timna)는 유황 무역의 허브였다. 페트라와 지중해까지 카라반으로 연결되었다. 바이한 계곡에서 큰 도시로 성장한 카타반 왕국의 팀나는 마인, 사바, 하드라마우트의 3개 고대 왕국을 연결하는 무역 요충지에 있었으며 무역대상들을 보호하는 대가로 세금을 걷었다. 팀나는 마리브 다음의 대도시로 커졌으며, 가장 크게 번성했던 기원전 3세기의 카타반 왕국은 마치 중세의 베네치아처럼 무역과 관련된 법, 규정, 벌칙을 제정하는 등 상인의 나라로 번성했다.

 

 

나즈란

 

#19. 나즈란

 

나즈란(Najran)은 예멘에서 발원하는 강이 마을 뒤로 흐르는 오아시스로 유향 무역로의 중간 거점이었다. 아라비아 남부의 각처에서 출발한 모든 카라반들은 나즈란에서 만났다. 여기에서 휴식을 취한 뒤 카라반들은 2개의 루트로 나누어 북으로 올라갔다. 북의 더 위쪽으로는 이집트와 지중해를 향하고,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로 향하는 길이었다.

 

 

국제무역의 거점인 메카

 

 #20. 이슬람 이전의 메카

 

나즈란에서 메카(Mecca)까지는 800킬로미터로 카라반에게는 약 20일이 걸렸다. 메카는 서쪽 산맥 사이에 만들어진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위대한 검은 운석을 소장한 큐브 모양의 카바 신전이 있어서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순례자들이 그 주위를 돌면서 예배를 드렸다.

 

메카는 바위산이서 농사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제다 항구와 가까이 있어 교역로의 거점으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북쪽은 가자, 북동쪽은 산 사이의 도로를 통해 메소포타미아로, 남쪽은 마리브로, 서쪽은 홍해 연안의 슈와이버(지금의 제다)에서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 등으로 육로와 뱃길이 사방으로 열려 있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몰려 온 유황, 몰약과 함께 아프리카와 극동에서 온 향신료, 가죽, 의약품, 과일, 곡식, 세라믹, 섬유, 노예들이 모여 거래되었다. 그 탁월함은 페트라를 능가했다고 한다.

 

 

 #21. 국제 무역 시장이었던 메카

 

특히 카라반의 안전한 통과를 보장하고 그들에게 물과 목초지 권리를 주면서 반대 급부를 얻어냈다. 메카의 부족들은 자본을 한데 모았고 투자금을 끌어들이면서 더욱 큰 부자가 되어 갔다. 카라반 운영, 대리인 고용, 무장 호송 등의 절차를 합리화했고 무역로 주변에 카라반 숙소를 설치했다. 메카에는 낙타 10마리 정도로 꾸며진 로칼 카라반에서부터 1,000마리 이상의 낙타 군단으로 위용을 갖춘 국제적인 카라반들과 순례자들로 항상 붐볐다.

 

 

사막의 오아시스, 메디나

 

 #22. 고대에는 야트리브로 불렸던 사막의 오아이스 메디나

 

카라반들은 낙타를 바꾸고 물품들을 보충한 다음 북쪽으로 더 나아갔다. 메카에서 북으로 350킬로미터를 더 올라가 산을 넘으면 메디나(Medinah)가 나온다. 이슬람 이전인 기원전 6세기에는 야트리브(Yathrib)로 불렸다. 산맥과 현무암, 화강암으로 둘러쌓인 와디에 위치한 메디나는 사막 가운데 있지만 밀이나 대추야자 같은 농산물이 자라는 비옥한 오아시스로 카라반에게 신선한 물을 제공했다.

 

 

붉은 사막, 와디 럼

 

 #23. 높은 계곡의 사막와디 럼

 

다시 메디나에서 800킬로미터나 떨어진 페트라로 가기 위해서는 타북(Tabuk)을 거쳐 와디 럼(Wadi Rum)을 통과해야 했다. 와디 럼은 총 720평방킬로미터의 광활한 사막이다. 언뜻 평지처럼 보이지만 가장 낮은 곳도 해발 1000미터인 고지대다. 아랍어로 높은 계곡이란 뜻의 와디 럼은 다른 사막과는 달리 붉은 모래로 유명한 곳이다. 당시 와디 럼을 가로지른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24. 사막 여행에 지친 낙타

 

사막에서는 뜨거운 모래와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더위 속에 있는 것은 기본이다. 낙타는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무거운 짐때문에 낙타는 쉬려고 하고, 사람은 가려고 하는 끊임없는 투쟁이다.

 

 

 #25. 사막에 남아있는 죽은 낙타의 잔재

 

타는 듯 내리쬐는 태양 속에서, 힘들 땐 사막 곳곳에 신기루가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물 한모금 먹지 않고도 보름을 너끈히 견딘다는 낙타도 힘에 부칠 것이다. 그래서 이길을 가다보면 낙타 시체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아마도 타는 목마름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어갔을 것이다. 목숨을 잃은게 어디 낙타뿐이랴, 이길을 떠났던 카라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먼길을 가면서 얼마나 많은 낙타와 사람이 생명을 잃었을까?

 

최악의 경우 카라반은 물이 없어 문제가 생기면 낙타를 죽이고 배를 가른다. 낙타는 두개의 위장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음식을 담고 있고 하나는 물을 담고 있다. 그래서 위장안에 있는 약간의 물을 구할 수 있다. 맛도 없고 신선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지만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26. 고대 카라반들의 낙서

 

와디 럼에는 거대한 바위산이 많다. 그런데 이 바위산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래된 낙서들이 곧 잘 눈에 띈다. 아라비아 남부에서 올라온 카라반들이 이곳을 지날때 잠시 쉬어갔는데 이때 자신의 이름을 낙서로 남겨놨다.

 

 

 #27. 천문학자이기도 한 카라반그래서 숱한 별들의 이름은 아랍어로 되어 있다.

 

바위산 너머로 붉은 해가 지면 달이 떠오르고, 하늘은 분홍빛으로, 보랏빛으로 변해간다. 태양 아래 타오르던 것들이 서늘하게 식어가고, 움츠려있던 것들이 생기를 되찾고 깨어난다. 카라반은 해질 무렵을 하루의 시작으로 여겼다. 그래서 카라반의 이동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밤에 방향을 잡고 이동하기 위해 카라반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또 봤을 것이다. 그 결과 숱한 별자리들을 찾아냈고 이 별들의 이름에 아랍어가 붙기 시작했다. 오늘날 까지도 아랍어가 어원인 별 이름이 많다.

 

 

 #28. 사막의 시계는 태양이다.

 

사막에 넘쳐나는 것은 또한 시간이었다. 그들에게 사막은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죽음에 대해, 신에 대해 절로 질문을 품게 하는 공간이었다. 사막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 예언자들을 낳기도 했지만 시인을 낳기도 했다. 사막의 사람들은 모두가 대단한 이야기꾼이고, 시인을 경외했다. 시와 음악은 사막에서의 외로움을 견디게 하는 오래된 벗이었다. 

 

 

 #29. 사막의 외로움

 

카라반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향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와 사막에 홀로 앉은 카라반. 카라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때때로 엄습해오는 고독과 맞써 싸워야 했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험한 여정, 도적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고향에 대한 그리움들이 이들을 한없이 외롭게 했을 것이다.

 

 

#30. 모래폭풍

 

거센 사막의 모래폭풍도 뚫어야 했다. 한번 불어 닥치면 사나흘은 불어 온다는 모래 폭풍. 이 모래 폭풍에 휩쓸리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렵다. 카라반이 겪었던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사투였다

 

 

 #31. 사막을 건너는 카라반〈프랑스 화가 찰스 테오도르 프레르(1814-1888)의 그림〉

 

사막에서의 위험은 끝이 없다. 도적 떼들은 호시탐탐 카라반의 유향을 노린다. 카라반이 가는 길은 항상 위험했다. 도적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험난한 지형을 택하기도 했으며, 값비싼 유향을 보호하기 위해 무역로의 주요 전략적인 지점에 휴식처를 만들었다. 이것이 카라반의 삶이었다. 이와 같은 위험한 삶을 살아갈 기력을 가졌던 카라반들은 분명 거칠고 험한 모험가였다. 

 

이런 위험을 겪어도 손실보다는 성공했을 때의 이익이 훨씬 컸다. 그래서 카라반의 여정은 멈칠줄 몰랐다. 험난한 과정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자들만이 와디 럼까지 올 수 있었다.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

 

#32. 페트라

 

당시 와디 럼은 나바테아(Nabatea) 왕국이 지배했다. 나바테아인들이 사막 한 가운데 자리를 잡은 이유는 원래 산적이었기 때문이다. 협곡에 감춰진 페트라(Petra)는 이들에게 숨어서 활동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알렉산드로 대왕이 사망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한 나바테아인들은 기회를 틈타 영토를 넓혀가게 된다. 

 

그리고 나서 나바테아인들은 다양한 종류의 향료 거래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나바테아인들은 이것을 현지 도매상에게 구입한 오래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페트라와 가자, 알렉산드리아까지 운송했고 이어 그리스 로마 등으로 수출되어 보다 비싼 값에 팔렸다

 

카라반들도 유향을 거래하기 위해 반드시 나바테아 왕국을 거쳐야 했다. 굉장히 비싼 물건을 북쪽으로 옮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카라반은 자신을 지켜줄 군사력이 필요했고 나바테아 군대의 보호를 받았다. 나바테아인들은 카라반에게서 보호의 댓가를 받고 그로인해 부유한 왕국을 쌓을 수 있었다.

 

 

 #33. 페트라로 통하는 입구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는 페트라다. 페트라는 붉은 사암 절벽으로 둘러싸인 장미빛 도시로 향료 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카라반들은 세금을 내고 나서야, 동쪽의 좁고 높은 계곡에 난 1.2킬로미터의 도로인 시크(Siq)를 통해서 페트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페트라는 이 세금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리고 황랑한 사막에서 암벽을 깎아 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카라반에게 세금을 받았던 곳은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일정 몫의 유향을 사제들과 왕의 환관들에게 상납해야 했다. 게다가 문지기, 시종과 하인들 몫까지 챙겨줘야 했다. 마실 물과 숙소, 낙타 사료를 구하기 위해서도 길을 가는 내내 세금을 내야 했다.

 

 

 #34. 고대유목민들의 종교 중심지이자 수도원〈영국의 수채화 화가 로데이비드 로버츠(1796-1864)가 그린 수도원〉

 

나바테아인이 아라비아의 거상으로 부상하면서 페트라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가 됐다. 사막에서 많은 부를 축적한 나바테아인들은 이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페트라는 고대 대상들의 세계 수도였던 셈이다. 나바테아인들은 페트라에 최신식 건축물을 짓기 위해 이집트의 장인들과 건축가들을 동원했다. 페트라에 지어진 건축물의 대부분은 기원전 1세기에 세워졌다. 그러나 사막 한가운데 도드라진 거점 도시는 로마제국의 표적이 됐다. 페트라가 서기 106년 로마군에게 점령당하며 나바테아 문명은 쇠락했다.

 

 

 #35. 팔미라 유적지〈미국의 풍경화가 존 다글라스 에드워드(1846-1924) 1883년도 그림〉

 

유향 무역로의 중심지가 된 페트라에서 카라반의 일부 그룹은 북쪽을 향해 나아가 보스트라(Bostra)와 다마스쿠스를 거쳐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팔미라에 도착했다. 이곳은 바빌론과 페르시아를 잇는 대상의 중계지로 “서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라고 불렸으며 나중에는 실크로드가 된다. 기원전 2-1세기에 건설된 팔미라는 기원후 3세기에 제노비아가 여왕으로 등극, 소아시아에서 북이집트에 걸쳐 건설한 거대 도시다. 하지만 훗날 로마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하고 만다. 세계사에서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가 소멸한 제국의 수도였다.

 

(2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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